google.com, pub-5408680833476551, DIRECT, f08c47fec0942fa0 한중관계의 역사 3 - 환향녀, 화냥년, 호로자식, 호로새끼
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한중관계의 역사 3 - 환향녀, 화냥년, 호로자식, 호로새끼

by 개인주의자 2024. 3. 16.

여러분은 여성을 비하하는 욕 중에 화냥년이라는 욕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욕하는 말로 호로자식 또는 호로새끼라는 욕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사실 이 모든 욕이 한 사건에서부터 유래된 것입니다. 그 사건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 매우 뼈아픈 역사이자 조선의 편협함과 비겁함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의 아픈 부분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직후인 16세기말에서 17세기 초, 중국에서는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왕조가 교체되는 시기였습니다. 선조의 아들이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실질적인 지휘자였던 광해군은 명나라와 신흥세력인 청나라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외교를 하면서 혼란기를 헤쳐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화사대주의와 임진왜란때 우리를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재조지은 사상에 찌들어있던 사대부들은 인조를 내세워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를 왕으로 추대하는 인조반정에 성공합니다. 그 인조와 사대부들이 이미 망조가 들린 명나라에 집착하다가 결국 청나라(당시 후금)에 두 차례 수모를 당하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게 됩니다.

 

한중관계 역사 시리즈

 

한중관계의 역사 1 - 공녀 조공

 

한중관계의 역사 2 - 중국 사신 대접  빨간 글씨를 클릭하면 해당 글로 이동합니다.

 

조선에서 인간사냥을 했던 여진족

두 차례의 청나라(당시 후금)에 의한 수모 중에서 뒤에 해당하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당시 후금)는 조선에서 대대적인 인간사냥을 하고 사냥감으로 수십만의 조선인들을 사로잡아 돌아갑니다. 그 수는 논문과 중국 갑질 2천 년이라는 책에 의하면 약 60만 명이었다고 말합니다.

 

청나라(당시 후금)로 끌려간 조선인들의 삶

이들은 심양(선양)으로 끌려가 노예로 팔였으며 값을 매기기 위해 모두 옷을 벗기고 건강상태를 확인했다고 합니다. 여성들 중 일부는 청나라(당시 후금)의 장군 혹은 고위층의 첩으로 팔려가서 그나마 나은 대우를 받았지만 그곳에서도 본처의 질투로 인하여 여러 말도 못 하는 학대를 당했다고 합니다.

 

 

 

혈육의 귀환을 위해 애쓰다

가족 중에 청나라(당시 후금)로 끌려간 사람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가족의 귀환을 위해 애를 썼습니다. 대개 몸값을 받고 다시 데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몸값이 여러 이유로 천정부지로 올라 결국 데려오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그 이유는 중간 관리들의 부정축재, 청나라(당시 후금)에서 조선인 노예와 관련된 사람들이 몸값을 높이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어렵게 돌아왔건만· · ·

어렵게 청나라(당시 후금)에서 돌아온 사람들 중에 남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여자들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먼저 사대부 양반집안에서는 돌아온 아내와 이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주자성리학적 관점에서 청나라(당시 후금)에 잡혀갔다 온 것 자체가 흠이 되어 돌아온 아내와 이혼하지 않을 경우 대대로 관직진출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당시 청나라(당시 후금)에서 힘들게 돌아온 여성들과의 이혼과 그 여성들의 자살이 사회문제가 되자 조정에서는 피해 여성을 내치지 말라고 지시하지만 양반 사대부집안에서는 말 그대로 개무시했습니다.

 

비하하는 욕이 생기다

돌아온 여성들은 이혼뿐만 아니라 환향녀라는 낙인이 찍혀 평생 힘들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화냥년이라는 여성을 비하하는 욕이 생겨났는데 그 의미는 '행실이나 몸가짐이 바르지 못한 여성'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또한 환향녀가 낳은 아이들을 호로자식 또는 호로새끼라고 비하하는 욕이 생겼습니다. 이 호로자식, 호로새끼의 의미는 오랑캐의 자식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매우 비겁하고 잔인했던· · ·

저는 사실 이 대목을 보고 마음에서 올라오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물론 잡아갔던 조선인들을 이렇게 대우했던 청나라(당시 후금)도 잔인했지만 그렇게 수모를 겪고 돌아온 사람들, 특히 여성들을 이렇게 대했던 조선이라는 국가, 그리고 양반 사대부 집안, 그리고 그들을 낙인찍고 욕을 했던 일반 민초들, 모두가 너무나 잔인하고 비겁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여성들이 청나라(당시 후금)에서 정조를 잃어버렸다고 해도 그게 어떻게 그 여성들 혼자의 잘못입니까? 아니 여성들의 잘못이 있기나 한 것인지도 의문스럽습니다. 국가가 약해서, 왕과 고위층이 외교를 잘못해서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잡혀가서 그런 고초를 겪었다면 마땅히 사회적으로 위로를 해줘도 모자랄 판에 어떻게 이렇게 대할 수 있었는지 전 참 의문스럽습니다.

 

한중관계 역사 시리즈

 

한중관계의 역사 1 - 공녀 조공

 

한중관계의 역사 2 - 중국 사신 대접  빨간 글씨를 클릭하면 해당 글로 이동합니다.

 

청나라(당시 후금)에 대한 생각이 바뀌다

저는 청나라(당시 후금)를 건국한 청나라 왕족들의 성이 아이신기오로(애신각라) 즉 신라를 사랑하고 기억한다 라는 의미를 가졌다고 들었었습니다. 또 그들의 조상이 신라의 김함보라는 사람이었다는 말도 들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어떤 환상이라고 할까요? 뭔가 가깝다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런 걸 느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알고 나서 이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여진족을 내내 깔보고 무시했던 조선의 태도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강성해졌을 때 명나라 사대주의를 버리고 그들을 무시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선인들에게 어떻게 이토록 잔인할 수 있었는지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미국과 중국을 또다시 생각하다

현재 패권국은 미국입니다. 그런데 미국이 한국에게 언제 이렇게 가혹하게 한 적이 있었습니까? 한국전쟁이 끝난 후 우리가 가장 약하고 못 살 때 그들이 한국인들을 인간사냥해서 수십만을 잡아가 그들의 노예로 쓴 적이 있었습니까? 오히려 미국의 대규모 원조로 우리는 굶주림과 아사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미국이 전부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미국도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중국과 비교했을 때 미국이라는 패권국은 너무나 인간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