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com, pub-5408680833476551, DIRECT, f08c47fec0942fa0 한중관계의 역사 2 - 중국 사신 대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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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관계의 역사 2 - 중국 사신 대접

by 개인주의자 2024. 3. 15.

외국에서 사신이 파견되어 오는 것은 파견한 사람을 대신하여 오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마땅한 대우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과거 우리나라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해서 마치 조선의 왕보다 사신이 위에 있는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오늘은 이 부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한중관계의 역사 시리즈

한중관계의 역사 1 - 공녀 조공

 

한중관계의 역사 3 - 환향녀, 화냥년, 호로자식, 호로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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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신은 어떤 길로 왔는가?

중국사신이 조선으로 올 때와 조선사신이 중국으로 갈 때는 항상 육로를 이용했습니다. 사실 해로를 이용하면 더 편하게 빨리 갈 수 있었을텐데 육로만 이용했던 것입니다. 처음 해로로 왕래하기 시작한 것이 1882년 8월 23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맺어진 후였습니다. 그렇다면 중국 사신은 조선에 올 때 어떤 길로 왔을까요?

 

중국사신이 왔다 갔던 육로 길

 

북경을 출발한 사신은 지금의 선양(심양)을 거쳐 신의주로 압록강을 넘어 조선으로 들어왔으며 평안 남북도, 황해도 개성을 거쳐 한양에 당도하였고 돌아갈 때도 같은 길로 갔습니다.

 

중국사신만 왔다하면 조선 고위층이 총출동

조선의 국경지역인 의주에 황제의 명으로 사절단을 보낸다는 통신문이 의주로 발송됩니다. 발송된 통신문이 의주에 도착하면 바로 한양으로 보내집니다. 한양에 통신문이 도착하면 중국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즉시 임시기구인 영접도감이 설치됩니다. 그리고 국경에서 한양까지 사신을 인도할 원접사가 뽑히는데 이 원접사는 교양과 학식이 풍부한 정 2품 이상 고위관리 중에서 뽑힙니다.

 

공녀조공에 대해 알고싶다면 한중관계의 역사 1 - 공녀 조공을 참조해 주시고 빨간 글씨를 클릭하면 해당 글로 넘어갑니다.

 

중국사신이 오는 동안 머무는 곳에서는 초호화 파티가 벌어져 

현재 같으면 자동차가 있어 의주에서 서울까지 몇 시간이면 오지만 당시에는 걸어오느라 때때로 쉬기도 하고 묵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중국사신이 쉬거나 특히 묵는 곳에서는 사신에게 초호화 접대를 했습니다. 각종 여흥이 제공되고 엄청난 요리에 심지어 성접대까지 했습니다.

 

중국사신의 심기경호까지

조선은 심지어 중국사신에 대해 심기경호까지 하는 추태를 보입니다. 사신이 오는 길이 불편하지 않도록 길에다가 황토까지 뿌려주고 기분을 언짢게 하여 그들이 황제에게 조선에 대해 나쁘게 보고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사신들의 기분을 나쁘지 않게 하느라 모두가 진땀을 뺐습니다. 그리고 사신이 요구하는 물품을 주느라 조선의 곳간은 사신이 올 때마다 텅텅 비기 일쑤였고 심지어 백성들의 가산까지 보태 사신에게 주곤 했습니다.

 

사신이 오면 왕 내외가 영은문까지 나가다

사신이 국경을 넘어 의주에서 출발하여 한양에 도착하면 왕 내외가 현재 홍제동 독립문자리에 있던 영은문까지 마중나가 궁궐로 사신을 모셨습니다. 경복궁에 도착하면 궁궐의 입구인 광화문으로 들어가는데 들어갈 때 중국사신을 먼저 앞세우고 왕 내외는 사신 뒤에서 따라 들어갔습니다.

 

칙서 앞에서 왕은 네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사베삼고두례를 예로 했습니다. 그러나 중종 때부터 절을 한번 더 하는 오배삼고두례로 바뀌었습니다. 정말 이런 것을 보면 자신이 속국이라는 것을 마음속으로 체화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왕 내외가 중국사신을 맞이했던 영은문

 

 

중국 현지에서는 사신을 뽑히기 위해 이런 짓까지 했다

당시 중국 현지에서는 조선으로 가는 사신을 선발했는데 이 사신에 선발되기 위해 담당자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남는 장사였기 때문입니다. 조선에 사신으로 간다는 것은 먼 길을 떠난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갔다 하면 뽑히기 위해 바쳤던 뇌물보다 훨씬 많은 재물을 조선에서 뜯어오기도 했고 가는 곳곳마다 자기네 나라에서는 받아본 적 없는 엄청난 대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1625년 조선에 중국사신으로 왔던 환관 왕민정은 은 10만 7천 냥, 인삼 2100근 표범가죽 204장, 큰 사슴 가죽 200장, 흰 종이 10600권 그 외에 호랑이 가죽, 부채, 기름먹인 종이 등을 요구했고 사신으로 뽑히기 위해 바쳤던 뇌물보다 훨씬 많은 13만 냥을 갈취해 갔습니다.

 

공녀조공에 대해 알고싶다면 한중관계의 역사 1 - 공녀 조공을 참조해 주시고 빨간 글씨를 클릭하면 해당 글로 넘어갑니다.

 

원래 이렇지 않았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중국사신을 이렇게 대했을까요? 원래부터? 아닙니다. 사실 원나라가 등장하기 전까지 우리 역대왕조들은 전혀 이렇지 않았습니다. 고려시대 중반까지도 우리는 중국대륙에 여러 나라들을 견제할 힘이 있었기에 절대 이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몽골족이 세계를 제패하고 원나라를 세우고 우리가 원나라에게 항복하면서 원나라는 고려의 왕들에게 충성할 충자를 시호 앞에 붙이기를 강요했고 또 원나라 공주와의 결혼을 강요했습니다. 이때부터 우리는 조금씩 자주성을 잃어버렸다고 '중국 갑질 2천 년'이라는 책은 말합니다.

 

그리고 조선이 건국되었는데 조선은 중화사상이 마음속 뿌리 깊게 자리 잡혀 있었던 주자성리학자들인 신진사대부들이 중심이 된 나라였기 때문에 자주성은 더욱 잃어버리고 소위말해 알아서 기는 상황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중화사상 개념도

 

 

조선은 처음부터 사대주의에 절어있던 나라였다.

이성계는 반역을 일으켜 새로운 나라를 건국한 후 나라의 이름을 정하는데 스스로 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성계는 명나라 태조인 주원장에게 국호를 정하려고 하는데 어떤 것이 좋겠는지 묻습니다. 여기서 선택지는 '조선'과 '화령'이었습니다. 화령이라는 것은 이성계가 출생한 곳의 지명입니다.

 

명 태조 주원장은 조선이라는 이름을 택정해 주면서

 

“동이(東夷)의 국호에 다만 조선의 칭호가 아름답고, 또 그것이 전래한 지가 오래되었으므로 이 명칭을 근본으로 삼아 후세에 이를 본받도록 하라.” - 네이버 지식백과 -

 

라는 명을 받아 조선으로 국호를 정합니다. 여기서 조선은 중국사람 기자가 와서 중흥시켰다는 기자조선을 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