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com, pub-5408680833476551, DIRECT, f08c47fec0942fa0 한일청구권협정은 막다른 길 에서 의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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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청구권협정은 막다른 길 에서 의 결정이었다

by 개인주의자 2023. 12. 29.

1965년 한국과 일본 간에 한일청구권협정이라는 조약이 맺어집니다. 이 조약은 엄청난 반대를 일으켰으며 반대론자들은 매국노라고 박정희 대통령을 욕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조약이 왜 맺어졌을까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이 부분을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한일청구권협정에 서명하는 대통령

 

한일청구권협정이 맺어지기 전 당시 한국정부는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빌리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광부와 간호사를 서독에 파견한 것입니다. 지금은 후진국 즉 개발도상국의 발전모델이 제시되어 있으나 그 당시에는 이렇다 할 모델이 없었습니다. 물론 지금의 발전모델은 우리나라가 제시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세계의 경제전문가들이 제시한 개발도상국의 경제개발 해법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먼저 농업을 발전시키고 그다음 경공업을 발전시켜 수입대체산업화를 통해 수입에 의존하던 제품을 국내에서 만듦으로써 수입을 안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다가 중화학공업으로 차차 단계를 거쳐 나가야 한다고 했던 겁니다. 문제는 이것도 영토가 크고 인구가 많고 지하자원이 많은 나라에서나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처럼 영토도 작고 인구도 많지 않고 더군다나 지하자원도 없는 나라에 대한 해법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농사나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안 그래도 작은 영토에 산지는 70%가 넘고 그나마 있는 농토는 다른 곳에 비하면 비옥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가 살길은 산업화라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동시에 월남전에서 미국이 지고 월남이 공산화된 당시에 당시 닉슨대통령이 아시아 국가는 스스로 지키라는 선언을 발표했고 우리는 무기를 우리 손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중화학공업과 산업화가 필요했던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우리 정부의 이러한 생각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던 나라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 케네디 대통령에게 가서 자금을 빌려달라고 부탁하지만 단칼에 거절당함과 동시에 세계은행에서 한국이 돈을 빌려 제철소를 짓고 중화학 공업을 하겠다고 하는데 이것은 말도 안 될뿐더러 흔히 후진국에 있는 부정축재에 쓰일 것이니 빌려주지 말라는 보고서를 썼기 때문에 더 이상 빌릴 곳이 없던 겁니다.

 

월남 대통령궁으로 진입하는 월맹군 탱크

 

그렇게 막다른 곳에 몰리자 결국 한일청구권협정을 떠올리게 되었던 겁니다. 사실 미국은 한국전쟁 휴전 때부터 우리가 일본과 수교를 하기 바랐습니다. 이것을 이용하여 일본과 수교하면서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금을 받아내어 당시 경제개발에 쓰고자 했던 겁니다. 지루한 협상 끝에 우리는 당시 일본에게 보상금 명목으로 무상 3억 달러, 차관 2억 달러를 받기로 했고 동시에 식민지 기간 동안 일본 민간인이 한반도에 투자했던 개인자산에 대해 일본정부의 권리포기를 받았습니다. 당시 이 금액은 당시 일본 외환보유고의 절반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액이었습니다.

 

또 일본이 우리에게 도움을 준 것이 있다면 포항제철을 지을 때 신 일본제철과 고베제강을 통해 기술자문을 해주었고 당시 이 자금을 농업자금으로 묶으라고 했던 미국을 일본정부가 직접 설득하여 산업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준 것입니다.

 

 

여기서 쟁점이 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이 보상을 받고 이후 개인피해보상에 대해 일본정부의 책임을 말소시키고 대신 우리 정부가 지기로 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문재인 정부당시 양국 간 개인보상문제를 놓고 그토록 갈등을 빚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