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com, pub-5408680833476551, DIRECT, f08c47fec0942fa0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10 - 88 서울 올림픽의 의미
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10 - 88 서울 올림픽의 의미

by 개인주의자 2024. 8. 12.

이번 포스팅에서는 전두환 정부가 세운 공 중에 가장 크고 백미라고 할 수 있는 88년 서울올림픽의 의미를 말하고자 합니다.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시리즈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1 - 전두환은 5.18과 어떤 관계인가?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2 - 전두환은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을까?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3 - 경제분야 1 : 전두환 정부 초기 경제상황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4 - 경제분야 2 : 인플레이션을 잡아라!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5 - 경제분야 3 : 금융민영화와 수입자유화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6 - 경제분야 4 : 3저호황과 외채의 악순환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7 - 산업정책 1 : 한국 반도체 산업의 시작과 발전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8 - 산업정책 2 : 통신혁명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9 - 국민 통제 해제 : 야간통행금지 해제, 두발 자유화, 교복 자율화 해외여행 · 해외 유학 자유화 등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11 - 시리즈를 마치며(왜 전두환 인가?)

빨간 제목을 클릭하시면 해당 글로 이동합니다.

 

88 서울 올림픽은 전두환의 장기집권을 방해했나?

이 부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88서울올림픽이 전두환이 독재정권을 이어가는데 심각한 장애를 줬다라고 말합니다. 즉 스스로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전두환대통령은 취임사때 부터 '평화로운 정권 이양'을 실현하고 전통을 세우겠다고 천명했었습니다. 따라서 정해진 임기를 넘어서 대통령에 재임할 생각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인플레이션을 잡을 때 이 사람이 했던 말이 있습니다. 김용삼 기자의 말에 의하면 인플레이션을 잡는 동안 사방에서 비난이 빗발치자 전두환은

 

"나는 단임으로 물러날 것이므로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국가 장래 위해 일한다".

- KNL, 서울의봄 영화 속 전두환은 어떻게 왜곡되었나? 전두환의 업적 강의 중에서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또한 86~87년도 쯤 되서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을 때 박정희 정부에서 그렇게 흔하게 발동되던 위수령, 게엄령 등을 하나도 발령시키지 않았고 오로지 경찰들로만 질서를 잡았습니다. 그렇게 1988년 2월, 자신의 임기가 끝나자 청와대에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내려와 연희동 자택으로 향했습니다.

88 서울 올림픽, 민심 수습책의 일환이었나?

전두환 정권이 88 서울 올림픽을 개최한 이유에 대해 민심 수습용이었다는 설이 파다합니다. 과연 사실일까요? 나무위키는 이에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짓밟고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은 민심수습책에 골몰하는데, 당시 막후에서 한국과 일본의 우익세력을 연결하는 밀사 역할을 하던 세지마 류조 이토추 상사 부회장이 극비리에 내한해서 전두환을 만난 자리에서 1964 도쿄 올림픽과 1970 오사카 엑스포를 예로 들면서 한국도 '이런 거대이벤트를 유치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데로 돌려보라'고 조언한 것이다. 신군부 세력은 이 조언을 받아들여서 최규하 정부의 유치포기 결정을 뒤집고 올림픽 유치에 정권의 사활을 걸었다. - 나무위키, 1988 서울 올림픽/유치 과정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10.26때 부터 12.12, 5.18로 이어지는 이른바 서울의 봄이라고 하는 기간동안 벌어졌던 모든 사건들을 일컫는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결국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은 광주 5.18로 터져나왔으나 전두환과 신군부가 잔인하게 짖밟고 자신들이 정권을 잡았다는 논리입니다.

 

저는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1, 2를 통해 12.12가 쿠데타가 아니었으며 전두환은 5.18과 관계가 없다는 점을 입증해드렸습니다. 따라서 위의 논리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진짜 서울 올림픽을 개최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렇다면 진짜로 전두환 정부가 88 서울 올림픽을 개최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여기에 대해 이장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올림픽 개최가 가능하기만 하다면 당시의 전두환으로서는 딱 마음에 드는 프로젝트 였다. 거창한 국제적 스포츠 행사를 성사시켜 낼 수 있다면 자신의 리더십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기회일 뿐 아니라, 집권 과정의 정당성 시비에서도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 이장규, 그런 선거는 져도 좋다, 209~210page

 

저도 이 부분에 대해 매우 동의합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자신이 국민의 뜻에 의해 뽑힌 대통령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 간접선거로 뽑힌 것이 불법은 아니었지만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88년 서울올림픽은 어떻게 우리를 바꿨는가?

1) 국격이 달라지다

서울 올림픽 이전, 세계인들에게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였을까요? 1945년 신생독립국, 1950~1953년, 3년간의 한국전쟁으로 전 국토가 완전히 파괴된 세계 최빈국, 분단된 나라라는 이미지가 전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올림픽 개막식부터 폐막식에 이르는 전 올림픽 중계방송을 통해 보여진 서울의 이미지는 전 세계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특히 소련과 동구권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대한민국을 가장 가난하고 비참한 나라로만 알고있던 소련과 동구권 사람은 올림픽 중계방송에 비친 서울의 모습, 특히 한강의 모습을 보며 자신들은 지금까지 뭘 했는가?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서울 올림픽은 공산권이 붕괴되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2) 한강이 달라지다

한강 고수부지에서 먹는 라면, 한강을 따라 나 있는 자전거 도로를 달리는 기분 등 한강을 생각하면 너무나 좋습니다. 서울에서도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의 가격이 매우 높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시사철, 가뭄 때도 폭 1km가 넘는 한강의 물은 가득차있고 특히 낮에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한강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한강이 원래 이랬을까요? 그것은 88 서울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한강을 개발했기 때문입니다. 한강 개발전에는 생활하수, 공장 오·폐수, 가축의 분뇨 등이 전혀 정화되지 않은 상태로 한강으로 흘러들어와 항상 악취가 났었다고 합니다. 뿐만아니라 가뭄이 되면 한강의 물은 말라붙어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올림픽이 열리게 되면 사람들은 김포공항으로 입국하여 올림픽 대로를 통해 잠실까지 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한강을 볼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이렇게 소위 개판인 한강은 국격 제고에 있어 상당한 마이너스가 되기 때문에 개발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한강 개발은 먼저 강 바닥의 모래를 파 내고, 서울각지에 4개의 하수처리장(중량, 탄천, 안양, 난지)을 만들어서 생활하수 등을 먼저 정화시킨 후 한강으로 내보내게 했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잠실과 강서구쪽에 수중보를 만들어 한강에 항상 물이 많게 했다고 합니다.

 

또한 강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쌓이게 된 퇴적토인 고수부지를 공원화 시켜 현재처럼 시민들이 항상 즐길 수 있도록 했습니다. 

 

 

3) 스포츠 강국이 되다

우리나라는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처음 출천한 이래 현재까지 많은 올림픽에 참가해 왔습니다. 이번 파리올림픽에서는 금메달 13개로 종합 8위에 올랐습니다. 올림픽만 출전하면 세계 10위권에 합류하는 것이 어느새부터 당연하게 느껴져 왔는데 과연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사실 전두환 정부 이전에는 종합 10위는 커녕 금메달 따는 것도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선수단이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금메달을 딴 때가 1976년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양정모 선수가 딴 금메달이 최초였습니다. 이랬던 나라가 전두환 정부를 거치면서 세계적인 스포츠 강국에 오른 것입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1981년 88년 하계올림픽의 개최지가 서울로 정해지고 나서 이대로 갔다가는 우리나라에서 개최하는 올림픽에서 태극기는 한번도 안올라가고 다른 나라 깃발만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한 전두환은 소위 엘리트 스포츠 육성을 기획하고 실현하게 됩니다.

 

먼저 전두환 정권은 '체육부'라는 부처를 신설하고 무대뽀로 열심히 훈련만 하는 것을 넘어 과학적으로 훈련시키기 위해 스포츠 과학 연구소를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현재와 같이 각각의 종목들을 후원하는 주체로서 각 기업의 경영자들을 지목했습니다. 이번에 양궁선수들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같이 사진을 찍었는데 현대차 그룹이 양궁종목의 후원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체계적으로 지원하고 훈련시킨 결과 전두환 정부의 첫 올림픽 이었던 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부터 금메달 6개로 종합 6위, 88년 서울올림픽 때 12개의 금메달로 종합 4위를 차지하는 등 이후에도 스포츠 강국으로서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4)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승리하다

6.25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북한은 우리보다 더 잘살았었습니다. 이후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공업 정책, 전두환 정부의 여러 경제정책과 전자산업 육성 정책으로 우리는 북한을 경제적으로 훨씬 앞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남북간 체제대결에서 북한이 불리해지고 있는 판에 1981년 남한이 88년 하계올림픽 개최권을 따내게 되었습니다.

 

북한으로서는 만약 남한이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한다면 체제경쟁에서 완전히 패배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최지 선정 이후 부터 수많은 방해를 하게 됩니다. 첫번째가 미얀마 아웅산 묘소 테러사건으로 대표되는 전두환 대통령 암살 시도였습니다. 두번째가 김현희의 KAL기 폭파사건으로 대표되는 공포분위기 조성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김일성은 올림픽의 남북 공동개최를 들고나왔으나 이 또한 실패했습니다.

 

이렇게 집요하고 주도면밀하게 올림픽 개최를 방해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결국 예정대로 서울올림픽이 성공적으로 치러지자 북한은 이에 대응한답시고 1989년 7월 1일 평양에서 제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합니다. 이를 위해서 북한은 모든 국력을 소진하게되며 이 축전은 90년대 말에 있었던 고난의 행군의 전초가 됩니다.

 

또한 북한의 동맹국들이자 한 블록을 형성하여 경제적으로 서로 의지하던 동구권과 소련이 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붕괴되자 북한의 어려움은 한층 가중되었습니다.

 

평양학생세계축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