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com, pub-5408680833476551, DIRECT, f08c47fec0942fa0 인물비교 이승만 VS 김구 - 왜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어야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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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비교 이승만 VS 김구 - 왜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어야 했는가?

by 개인주의자 2024. 2. 14.

오늘 이 포스팅으로 가장 왜곡이 많이 되어 욕먹고 있는 이승만과 역시 상당히 왜곡되어 실제 한 일, 능력보다 훨씬 더 추앙받는 김구를 비교하며 왜 해방당시 이승만이 대통령에 되었는지 그것을 조명하고자 합니다.

 

 

김구(金九)

김구의 본명은 김창수로 1876년 8월 29일에 태어났습니다. 김구은 청년기에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기도 하고 압록강 근방에서 만난 청나라 사람 김이언의 의병단에 가입하기도 했습니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의 무효투쟁을 벌여 국권회복운동에 가담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분의 가장 큰 이력이 바로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했고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을 거쳐 국무총리, 결국 주석까지 하셨던 분으로 독립운동에 관한 한 엄청나게 많은 이력이 있어 한 포스팅으로 전부 다루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김구의 가장 큰 공은 임시정부를 공산당으로부터 지켜낸 것이다

요즘 좌파들이 이승만을 죽이고 김구를 띄우는데 그것은 김구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몰라서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이승만을 죽일 수만 있다면 차선책인 김구를 이용한다 뭐 이런 것일까요? 김구선생님은 공산주의자들을 심지어 주먹으로 패기도 하셨습니다. 만약 현재 김구선생님이 살아계셨다면 586세대들은 전부 빠따를 맞았을 겁니다. 김구은 소련이 코민테른을 이용하여 이동휘 같은 사람에게 접근하여 임시정부를 공산화하려던 계획에 철저히 반대하며 막아선 분입니다. 이분 덕분에 소련 공산당이 임시정부에 침투하지 못합니다.

 

반면 김구는 앞뒤가 맞지 않는 치하포 사건을 일으키다

이 사건에 대해 간단히 서술하고 다른 포스팅에서 제대로 정리하여 쓰겠습니다. 이 사건은 쓰치다 조스케의 신분도 김구는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조선인으로 변장하여 도피 중이었던 일본인으로 말하고 있으나 일본기록이나 도진순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단순한 상인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천으로 압송되어 수감생활 중 황성신문에 자신이 사형언도를 받았다는 기사를 봤다는 날짜가 1896년 8월인데 문제는 황성신문은 1898년 9월에 창간되었으므로 당시에는 없었습니다.

 

또 황성신문 창간 후 어느 날 자신이 인천감옥을 학교로 만들었다는 기사를 봤다고 했는데 이것도 맞지 않습니다. 황성신문은 1898년 9월에 창간된 반면 김구는 1898년 3월에 탈옥하여 감옥에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종이 전화로 자기의 사형집행을 중지시켰다는 내용이 있는데 먼저 김구가 자신의 사형언도를 황성신문 기사를 통해 처음 알았다고 한 1896년 8월에는 황성신문이 없었고 1896년 11월 7일 독립신문에 단신으로 살인범 김창수의 사형언도에 관한 기사가 최초로 보도됩니다. 그런데 고종이 전화를 하여 사면을 받은 날짜가 1896년 10월 2일로 나옵니다.

 

즉 김구가 자신이 사형언도를 받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안 날짜보다 고종이 전화 걸어 사면한 날짜가 먼저인 것입니다. 거기다가 고종이 사면전화를 했다는 1896년 10월 2일에는 조선에 전화가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그날에 고종은 아관파천을 하여 러시아 공사관에 있었습니다. 조선에 전화가 최초로 개통된 때가 대한제국 설립 직후인 1898년 초, 중반입니다.

 

이것에 대해 저는 김구가 조작했다고 생각합니다.

 

해방 후 김구는 김일성에게 이용당하고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하다

이승만대통령과 김구선생님은 해방 전 매우 막역한 사이였습니다. 제가 이승만은 왜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을 반대했는가? 의 마지막 부분에 썼듯이 이승만은 미국의 도움으로 충칭 임정의 김구와 계속 연락하며 미국에 충칭 임시정부를 인정하고 광복군을 무장시켜 주면 미국을 도와 일본과 싸우겠다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합니다. (빨간 글씨를 클릭하면 해당글로 넘어갑니다)

 

거기다가 사실 충칭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장제스의 지원을 받았던 터라 미군정은 김구를 개인자격으로 입국시킵니다. 개인자격으로 제한한 것은 미군정이었으나 입국을 주선한 사람은 이승만이었습니다.

 

그러나 입국 후 자신이 대통령이 되지 못할 것을 간파한 김구는 북한으로 올라가 김일성과 회담을 하며 이용당하고 그때 김일성은 김구선생님을 대통령으로 하고 자신이 부통령을 하겠다는 입에 발린 소리를 합니다. 북한에 가서 군사력을 보고 다시 내려온 후 그 이후부터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합니다. 그러다가 안두희라는 제자에게 암살당합니다.

 

김구가 김일성에게 어떻게 이용당했는지 알고싶다면

 

김구는 김일성과 공산주의자들에게 어떻게 이용당했나? 1 -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요인회담 제안까지를 참조해 주시고 빨간글씨를 클릭하면 해당 글로 이동합니다.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북한으로 떠나는 김구일행

 

 

김구의 학력 수준

백범일지에 인천감옥을 학교로 만들었다는 미담 섞인 기사는 타임테이블을 봤을 때 앞뒤가 맞지 않아 거짓말로 보입니다. 김구는 영어도 못했고 따라서 국제정세에도 밝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김구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경험조차 못해본 사람으로서 김구가 초대대통령이 되었다면 지금과 같은 나라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김구가 김일성에게 이용당한 것을 생각해 보면 공산주의와 공산주의자에 대해 잘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 이들을 잘 알았다면 이용당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승만

이승만은 전주이 씨 왕족 출신으로 양녕대군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과거시험이 폐지될 때까지 과거시험을 준비하며 사서삼경에 통달합니다. 그러나 계속된 낙방과 함께 과거시험이 폐지되자 친구의 권유로 배재학당에 들어가 수학하게 되며 이때 영어를 배워 졸업할 때는 영어로 연설까지 합니다.

 

미국으로 가다

만민공동회 활동으로 감옥에 가게 되고 그 와중에 탈옥하다 잡혀 사형수로서 한성감옥에 있던 중 기독교 신자가 되며 동시에 독립정신이라는 희대의 명저를 저술합니다. 약 5년간의 수감생활 후 그는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출옥하여 도미하게 됩니다. 미국에서 배재학당의 학력이 인정되어 조지워싱턴 대학으로 편입한 후 졸업을 하게 되고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 프린스턴대학에서 국제법 박사학위를 받게 됩니다.

 

그의 엄청난 인맥관계

따라서 그는 국제법, 국제정세의 전문가가 되며 그 학력을 이용하여 미국의 지도층과 만나며 한국을 적극적으로 알리면서 외교독립노선을 지속해 나갑니다. 그가 만났던 대표적인 사람들을 뽑자면 존 포스터 덜레스 미 국무부 고문, 맥아더 장군 본인과 그의 아버지, 우드로 윌슨 대통령(프린스턴 대 은사) 등이 있습니다.

 

맥아더 장군과의 인연을 알고싶으시다면 이승만의 사람들 - 맥아더 장군 1 - 두 사람의 만남이승만의 사람들 - 맥아더 장군 2 - 두 사람의 교제를 참조 바라며 빨간 글씨를 클릭하면 해당글로 넘어갑니다.

 

왼쪽 - 덜레스, 우측 위 - 맥아더, 우측 아래 - 우드로 윌슨

 

 

공산주의를 꿰뚫어 본 혜안

이승만은 1923년 3월 자신이 창간한 태평양 잡지에 공산당의 당부당이라는 글을 씁니다. 그때는 공산주의가 실제로 무엇인지도 잘 몰랐고 지금처럼 실패로 드러나지 않았던 터라 공산주의가 매우 추앙받던 시기에 나온 글입니다. 이 글은 다섯 가지 명제로 공산주의가 잘못된 것임을 드러내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재산을 나누어 가지자 - 게으른 가난뱅이가 늘어난다.
2. 자본가를 없애자 - 지혜와 상공업 발달이 정지된다.
3. 지식계급을 없애자 - 모든 이들이 우매해진다.
4. 종교를 혁파하자 - 덕과 의가 타락한다.
5. 정부와 군사와 국가사상을 다 없애고 소련만 믿음녀 결국 배반당한다. 

 

위의 다섯 가지는 공산당이 실패로 드러나며 다 입증된 것입니다. 공산주의와 공산당에 대해 잘 알았기 때문에 해방공간에서 공산주의자 들와 상대도 안 했으며 좌우합작을 철저히 거절한 것입니다.

 

공산당의 당부당 원문

 

 

그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알았다

나라를 건국할 때 당시 우리 국민들은 공산주의와 왕조국가밖에 경험하지 못한 터라 자유민주주의가 뭔지 자본주의가 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뭘 알아야 좋은 줄 알고 택하는 데 있는 줄도 모르니 당연히 택할 수도 없던 것입니다. 그런 우리 국민을 지금과 같은 체제로 이끈 사람이 이승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