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com, pub-5408680833476551, DIRECT, f08c47fec0942fa0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한 이승만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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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한 이승만의 투쟁

by 개인주의자 2024. 2. 16.

우리나라에 정권이 좌파에서 우파로 또 우파에서 좌파로 바뀔 때마다 미국과의 관계에서 항상 나오는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전시작전권(전작권) 문제입니다. 이 전시작전권은 한미상호방위조약과 관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어떻게 체결되었을까요? 또 전시작전권(전작권)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전시작전권(전작권)을 어떻게 해야할까? 를 보시기 바랍니다. (빨간 글씨를 클릭하면 해당 글로 넘어갑니다.)

 

 

미국의 휴전(정전) 협정을 생각하다

미국은 중공군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후퇴했던 1.4 후퇴 이후 휴전(정전) 협정을 생각하게 됩니다. 실제로 6.25전쟁 관련 타임지의 기사를 따라가다 보면 1.4후퇴 이후 휴전(정전)협정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휴전(정전)협정을 생각하게 되었을까요?

 

유럽에서 소련과의 대립에 집중하고 싶었다

미국이 요즘에는 유럽과 동아시아를 지정학적으로 비슷한 중요성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중국의 부상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전통적으로도 그렇고 6.25 때도 그렇고 자신들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유럽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미국은 하루빨리 지루하게 이어지는 한국전쟁에서 발을 빼고 유럽에서 벌어지는 소련과의 대립에 집중하고 싶었습니다.

 

 

말로만 하는 휴전(정전) 협정은 아무 필요 없다

문재인정부 때 북한과 종전협정을 하자고 그렇게 미국을 달달 볶아 댔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휴전협정, 정전협정, 불가침 조약 같은 이른바 전쟁을 하지 말자라고 하는 조약들은 지켜진 사례가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 더 깊게 알고 싶다면 평화협정? 종전선언? 불가침조약? 그런 것은 쓰레기다를 보시기 바라며 빨간 글씨를 클릭하면 해당 글로 넘어갑니다.

 

1953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휴전(정전) 협정 대해 논의되기 시작하다

위에서 쓴 대로 휴전(정전) 협정에 대한 이야기는 1951년에 있었던 1.4 후퇴 때부터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휴전(정전) 협정이 급물살을 타게 된 때는 1953년 3월 이후부터입니다. 왜 그럴까요? 1953년 3월에 휴전(정전) 협정을 그렇게 반대하던 스탈린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알고 싶으시면 한국전쟁(6.25)에 중공군을 참전시킨 것은 소련의 스탈린이다를 보시기 바라며 빨간 글씨를 클릭하면 해당 글로 넘어갑니다.

 

 

이승만과 미국정부 간의 극한대립이 시작되다

공산권과 휴전(정전) 협정을 하려는 미국과 그것을 반대하는 이승만정부 사이에 극한대립이 시작됩니다.

 

이승만정부는 만약 분단상태에서 휴전(정전) 협정이 이뤄진다면 단독으로라도 북진을 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렇게 극하기 반발하는 이승만대통령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에버래디 작전이었습니다. 이 작전은 반공포로석방 한 달 전 검토된 이승만의 제거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하는데 그 이유가 이승만을 대체할 수 있는 훌륭한 반공지도자가 없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뿐만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이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낸 전보에서 "정전협정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형선고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라며 강하게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유엔이 우리에게 정전협정에 협조하라는 것은 적과 손을 잡으라는 것과 다름없다"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전국에서 휴전반대궐기대회가 일어나다

아무 대책 없는 휴전(정전) 협정은 공산국가의 재침략을 방지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생각은 이승만대통령 만의 생각이 아니라 전국민적인 생각이었기에 전국에서 휴전반대궐기대회가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전국민적인 의지를 미국에 보여준 것입니다.

 

휴전반대궐기대회

 

이승만정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미국에게 요구하다

만약 죽어도 미국이 한국전쟁을 휴전(정전) 협정으로 끝내야겠다면 한국에 대한 안전보장을 조건으로 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 달라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요구합니다. 당연히 미국은 거절했습니다. 원래 미국은 고립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로서 필리핀과 맺은 조약은 필리핀이 미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미국이 안전보장을 해준 것이고 일본의 경우는 평화헌법을 강요하면서 일본의 안보를 미국이 지켜주는 것입니다. 대신 일본은 미국의 통제하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한국과의 조약은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맺는 상호방위조약으로서 그 성격이 다릅니다.

 

당시 한국과 미국이 국력차이는 말할 필요도 없이 엄청난 차이가 났습니다. 세계 초강대국과 얼마 전 독립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작은 나라에 3년간 전쟁으로 국토는 전부 초토화되어 가난하기로는 세계 1등이 아니면 서러운 나라가 대등하게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너무 황당하고 미국으로서는 일방적으로 손해 보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때 한국과 미국의 국력차이는 문재인 정부 때 한국과 감비아보다 훨씬 더 많이 차이 났습니다. 만약 우리가 감비아와 한 감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면 우리 국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이승만의 과감한 선택, 반공포로 석방을 해버리다

반공포로 석방이 중요한 이유는 원래 휴전(정전) 협정을 하면 양측이 사로잡은 포로들을 교환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반공포로라는 것은 북한이나 중공군으로서 포로가 되어 거제도에 수용되어 있는 동안 사상교육을 받고 전향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을 1953년 6월 18일 일방적으로 풀어줌으로서 교환할 포로가 없게 만들어 급진전을 보이던 휴전(정전)협정을 방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석방되어 좋아하고 있는 반공포로들

 

 

미국과 또 막말을 주고받다

이승만의 일방적인 반공포로 석방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미국정부는 "우리가 친구 대신 또 다른 적을 얻은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반공포로 석방 이후 미국은 로버트슨 미 국무부 차관보를 파견하여 이승만대통령과 대화하게 했으며 이 자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로버트슨 특사에게

 

미국에 대한 우리의 확고부동한 신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1910년 일본의 한국합병과 1945년 한반도의 양분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 두 번이나 (미국에 의해) 배신당했다. 지금의 사태는 또 다른 배신 같은 것을 시사한다. 

라고 말하며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또한 로버트슨 특사를 통해 미국정부에게

 

미국이 계속 반대하면 한국은 단독으로 북한과 전쟁을 하겠음.
정전협정을 맺겠다면 그 대가로 미국은 즉시 한미상호방위조약 협상을 시작할 것.
미국은 한국 지상군 20개 사단 증강을 지원할 것.
정전협정 체결 이후 공산 측과 정치적 합의에 이르지 못한다면 과감히 정전 관련 회담을 포길 할 것.

 

을 요구했고 1953년 7월 2일 미국은 한국이 더 이상 물어나지 않을 것을 직감하고 정부 외교 각서를 통해 한국 측의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알려왔습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장면

 

 

드디어 휴전(정전) 협정과 함께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정전) 협정이 체결되고 1953년 6월 26일 ~ 8월 8일까지 12회의 회동을 하며 이견을 좁히고 상호이해를 증진했습니다. 특히 8월 5일 회담에서는 덜레스 국무장관이 방한하여 좀 더 무게 있는 협상을 진행했고 미국 측이 자동군사개입을 빼는 조건을 제시했고 한국은 "헌법상 수속에 따라 어느 한 측의 무력공격에 대처한다."라고 한발 물러났습니다. 이에 대해 덜레스 국무장관은 공개 라디오 방송을 통해 "공산권이 한국을 무력으로 위협하면 미국도 무력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2회에 걸쳐 공식 천명하는 것으로 화답했습니다.

 

이에 따라 1953년 8월 8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은 가조인되었고 10월 1일 미 국무장관과 한국 외무장관의 서명으로 워싱턴에서 공식체결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혜택은 자손만대가 누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음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전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