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com, pub-5408680833476551, DIRECT, f08c47fec0942fa0 이승만은 왜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을 반대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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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왜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을 반대했는가?

by 개인주의자 2024. 1. 28.

우리는 현재 독립운동사에 대해 배울 때 매우 한쪽으로 치우쳐 배웁니다. 바로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을 중심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이것은 다른 항일투쟁노선을 배제한 채 한쪽 노선만을 치우쳐 배우는 것이며 또 정말 중요한 것은 배우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독립운동에는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만 있는 것이 아니다

먼저 저는 독립군을 조직하여 독립군이 완전히 해체되는 자유시참변까지 만주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하셨던 분들에게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연히 역사적으로 대한민국은 미국이라는 나라에 의해 독립을 한 것이지 절대로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으로 독립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의 역사는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와 똑같이 실질적으로 우리나라를 독립하게 한 이승만의 외교독립투쟁도 배워야 합니다. 또 당시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해서도 적나라하게 있는 그대로 배워야 합니다.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해 정말 중요한 것을 배우지 못하다

여러분은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해 어떤 것을 알고 계신가요? 청산리대첩, 봉오동전투는 아마 못들어 본 분들이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김좌진 장군, 홍범도 장군에 대해 당연히 모르시는 분이 없을 것입니다.

 

자 그럼 제가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혹시 간도참변은 아시는지요? 또 당시 독립군의 규모와 무장상태, 반대로 일본군의 규모와 무장상태는 아시는지요? 아마 모르실 것입니다. 이것을 모른 채 일본군을 크게 이겼다는 청산리대첩과 봉오동전투만 알고 있으니 독립군의 규모와 무장상태가 일본군과 뭔가 해볼 만한 상황이었다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큰 오해입니다.

 

독립군과 일본군의 규모와 무장상태 비교

실제 독립군과 일본군의 규모와 무장상태를 냉정하게 비교해야 합니다. 저는 김용삼기자의 방송내용을 참고합니다.

 

군 별 규  모 무장상태
독립군 3000명 2~3명당 총 한 자루, 총 한자루당 총알 100발 내외
일본군 7000000명 1차세계대전 승전국으로 세계 3대 군사대국에 등극

 

독립군의 경우 김좌진, 이범석의 북로군정서, 홍범도, 최진동의 대한독립군,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광복군 사령부를 합친 규모로서 해마다 조금씩 달라지지만 가장 많을 때가 3000명 이었다고 합니다.

 

반면 일본은 1914년에서 1918년까지 벌어진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엄청난 군수물자를 팔았고 그 재원으로 군사력을 발전시켜 규모나 질로나 당시 세계 3대 군사대국에 올라갑니다. 동시에 제1차 세계대전의 5대 승전국중 하나가 됩니다.

 

일본의 막강해진 국력을 대변하는 것이 바로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으로서 1921년 11월 11일에서 1922년 2월 6일까지 워싱턴 DC에서 개최된 해군의 군축문제에 대한 토의에서 채택된 조약입니다. 이 조약에서 채택된 내용은 표와 같습니다.

 

 

 

이 군축조약에 일본이 참여했을 정도로 일본의 국력은 세계에서 막강해진 상횡이었습니다. 따라서 솔직히 항일무장투쟁은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청산리대첩과 봉오동전투의 결과와 그 이후

청산리대첩은 1920년 김좌진,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북로 정서군 2500명의 독립군의 50000만 명의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일본군 3300명을 전사시킨 전투라고 합니다. 또한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4일 대한신민단의 독립군 부대가 함경북도 종성 군 강양동에 있는 일본군 순찰소를 습격했고 이를 소탕하기 위해 추격해 오던 일본군 19사단의 월경추격대대를 대한북로독군부와 대한신민단의 연합 독립군이 이들을 쳐부순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강했던 일본군이 졌을까요? 일본군이 진 이유는 첫째, 일본군이 독립군을 깔보고 권총 이외에 별 무장을 하지 않았다. 둘째, 독립군이 지형지물을 잘 이용했다. 마지막 세번째로 체코군단의 잉여무기로 싸웠다. 이 세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전투의 전과가 많이 과장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정설입니다. 뿐만아니라 독립군이 해체되는 자유시참변까지 또 그 이후 우리 독립을 위한 집단이든 중국 공산당 앞잡이 부대든 이후 어떤 집단에 의해 주도된 항일무장투쟁도 일본군에 의해 완전히 제압당합니다.

 

경신대참변(간도대참변)

1920년 일본군이 만주일대에 살던 조선인 약 35000명을 학살했던 사건입니다. 일본군이 이렇게 잔인하게 학살한 이유는 크게 두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독립군의 보급로 차단입니다. 독립군도 군대이기 때문에 군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군비를 충당하기 위해 간도에 사는 동포들을 대상으로 돈을 걷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조선인들에게 겁을 줘서 독립군에게 군비를 주다 걸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한 겁니다. 둘째, 독립군에 대한 경고입니다. 독립군이 일본군 한 명을 죽일 때마다 조선인들을 그에 상응하여 여러 명을 죽이겠다고 경고한 것입니다. 이후 겁먹은 우리 동포들은 독립군에 모금하는 것을 극히 꺼리게 되었으며 독립군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간도대참변

 

 

이승만은 이 모든 결과를 예상했다

이승만은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이 결과가 경신대참변(간도대참변)으로 이어질 것을 예견했습니다. 독립군의 무장상태나 규모가 일본군을 압도적으로 이길만큼이 되지 않으면 일본군은 독립군을 잡기 위해 우리 동포들을 힘들게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항일무장투쟁도 알맞은 시기가 있다고 말하며 지금은 우리가 나라를 되찾았을 때 운영해 나갈 실력을 갖추고 국제정세를 공부하라고 했습니다.

 

이승만은 태평양전쟁때 광복군을 지지했다

이승만은 미국과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할 때 당시 충칭임시정부에 있던 광복군을 지지하고 충칭임시정부와 미국의 도움으로 연락해가며 미국에서 일을 하면서 미국에게 광복군과 임시정부를 인정하고 무장시켜주면 우리가 너희를 도와 일본과 싸우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이 요구는 거절되었고 당시 광복군 사령관이었던 지청천(이청천) 장군은 이승만 내각에서 무임소장관을 역임하며 고향 종로의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광복군 사령관 지청전 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