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com, pub-5408680833476551, DIRECT, f08c47fec0942fa0 비극에서 축복으로 바뀐 여순(여수순천) 반란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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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에서 축복으로 바뀐 여순(여수순천) 반란사건

by 개인주의자 2024. 2. 26.

여러분은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중지시킨 것에 대해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이로 인해 과거 이승만을 친일파로 규정하는 말을 많이 들어왔을 것입니다. 오늘 이 글을 통해 왜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중지시켰는지 이해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반민특위 중지에 대해 더 깊게 알고 싶다면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중지시킨 이유와 대책을 참조하시고 빨간 글씨를 클릭하면 해당글로 넘어갑니다.

 

여순(여수순천) 반란사건의 개요

여순(여수순천) 반란사건은 건국 후 두 달이 지난 1948년 10월 19일 제주 4.3 사건에 대한 진압을 위해 제주도로 출동을 명령받은 여수 순천지역에 주둔해 있던 14 연대에서 일어난 반란사건입니다.

 

여순(여수순천) 반란사건의 반란세력은 미군이 지급한 M-1 소총과 박격포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3000여 정의 구식소총을 아직 반납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이 총들로 민간인 동조자들을 무장시켰습니다.

 

 

 

인민위원회 설치와 활동

이들은 순식간에 여수 순천 지역을 점령한 후 인민위원회를 설치하고 약 400여 명의 경찰들과 우익인사들을 살해했습니다. 이들이 인민위원회를 설치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의 특징으로서 6.25 때 인천상륙작전 이전까지 자신들이 점령했던 남한지역에서도 인민위원회를 설치했었습니다.

 

인민위원회는 너무나 잔혹하여 증언에 의하면 이들은 순천경찰서장을 살해할 때 두 눈을 뽑고 자동차에 매달아 의식을 잃을 때까지 끌고 다니며 살해했고 그 시신을 기름을 끼얹어 장대에 매달아 태웠다고 합니다.

 

또한 이들이 여수 순천지역을 점령하는 동안 수많은 우익인사들을 인민재판에 회부하여 현장에서 총살하였고 이로 인해 죽은 시체들은 신원을 감추기 위해 콜타르를 칠한 후 여수 비행장 근처 도랑이나 하수구에 버렸다고 합니다. 이 시신들의 상태는 대부분 팔다리가 잘리거나 등 뒤로 손이 결박된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여수순천 반란사건의 희생자들

 

 

여순(여수순천) 반란사건의 종료

여순(여수순천) 반란사건 발생 3일 후 인 22일 진압군은 순천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로인해 반란군의 주력은 인근 산악지대로 후퇴했습니다. 그 후 광양일대로 진출하여 반란군 주력을 섬멸했고 여수탈환을 위해 2단계 작전을 시작했으나 반란군은 여수 입구에 매복했고 진압군을 습격하였습니다. 이 습격 중 여수 반란군의 주력이 백운산과 지리산으로 도주했습니다. 이후 이틀 동안 여수시내에 대한 박격포 사격 등 시가전이 2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이후 진압군이 여수를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여순(여수순천)반란사건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비극에서 축복으로 - 여순(여수순천)반란사건의 결과

군 내의 공산주의자 척결

당시 국가안보의 두 축이 경찰과 국방경비대(군) 였었습니다. 경찰은 일제강점기 때 경찰업무에 경력을 쌓은 사람들이 주축이었고 사상적으로는 우익이었습니다. 반면 국방경비대는 모집당시 사상검증을 하지 않아 좌익들이 많은 상황이었습니다. 군내의 반란사건인 여순(여수순천)반란사건으로 인해 군 내의 사상의 위기를 느낀 이승만 정부는 군 내의 좌익인사에 대한 숙청작업을 시작하여 4749명의 장교와 병사들을 숙청했습니다.

 

군 내의 사상교체

숙청된 장병들을 대신하여 훈련된 수많은 우익청년들이 군에 들어갔고 이로 인해 군사력이 급속히 증강되었습니다. 또 약 8개월 뒤 벌어진 6.25 전쟁에서 군이 단합되어 일사불란하게 북한군과 싸우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공산주의에 대한 기피

여순(여수순천) 반란사건에서 반란군들이 인민위원회를 만들어 점령지역에서 했던 여러 범죄들은 매우 잔인했습니다. 순천경찰서장 살해사건, 수많은 우익인사 살해 등 잔인한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 공산당이라면 치를 떠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국가보안법 제정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잔혹한 반란사건이 있은 후 더 이상 공산주의는 다양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하에 이승만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했습니다. 따라서 공산주의를 강력하게 억제할 수 있는 법적 장치가 만들어졌습니다.

 

 

 

과연 반민특위 중지가 비난받을 일인가?

일제는 공산주의에 대해 엄청난 탄압을 가했었습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때는 한반도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자취가 거의 없어질 지경이었습니다. 따라서 건국 후 공산주의자를 잡는 데는 일제강점기 때 경찰역할을 하며 공산주의자를 잡았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물론 경찰만 필요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도 반공을 국시로 하며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했음에도 제주 4.3 사건, 여순(여수순천)반란사건 등 건국을 방해하고 나라를 전복시키기 위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만약 반민특위를 계속하여 전부 친일파로 단죄하고 이들을 쓰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반민특위 중지에 대해 더 깊게 알고 싶다면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중지시킨 이유와 대책을 참조하시고 빨간 글씨를 클릭하면 해당글로 넘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