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com, pub-5408680833476551, DIRECT, f08c47fec0942fa0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9 - 홍위병의 종말과 농촌으로 상산하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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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9 - 홍위병의 종말과 농촌으로 상산하향

by 개인주의자 2024. 6. 16.

1966년 5월 칭화대학 부속 중학교에서 처음으로 홍위병 단체가 출현한지 악 2년 후 홍위병의 모든 활동은 종말을 맞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농촌으로 하방됩니다. 마오쩌둥(모택동)은 분명 홍위병을 지지했고 심지어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대규모 홍위병 집회에 참석하여 쑹빈빈이라는 여중생에게 홍위병 완장채움을 받았습니다. 거기다가 여러가지 암시적인 말로 홍위병의 무력투쟁을 주문하기도 했던 그가 왜 홍위병의 활동을 종결시키고 이들을 농촌으로 하방시켰을까요?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시리즈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1 - 마오쩌둥(모택동)과 중국 인민들의 정신세계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2 - 문화(대)혁명의 시작, 해서파관 사건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3 - 해서파관 사건 이후에서 5-16통지까지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4 - 대중동원과 홍위병의 등장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5 - 홍위병들의 구호, 조반유리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6 - 홍위병들의 활동(폭력 및 살인)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7 - 홍위병들의 활동(문화재 파괴)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8 - 홍위병의 분열과 류사오치의 수난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10 - 마오쩌둥(모택동)의 죽음과 문화(대)혁명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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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모택동)도 홍위병을 완벽히 통제하기 어려웠다

마오쩌둥(모택동)은 홍위병이 출현했을 때 부터 인민해방군도 그들을 통제할 수 없을 만큼 홍위병에게 거의 전권을 주다시피 했었습니다. 그렇다보니 홍위병 내부에서도 여러 문제가 발생했고 그들의 활동이 걷잡을 수 없이 이성을 잃고 과격해지는 양상을 보이면서 마오쩌둥(모택동)도 완전히 통제하기가 점점 어려워 졌습니다. 그렇다면 무슨문제가 있었을까요?

 

1. 분열의 심각함

제가 바로 전 포스팅,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8에서 홍위병이 조직되었을 때부터 각자의 출신성분에 따라 보황파와 조반파로 나누어 졌고 이 둘이 물과 기름처럼 절대 섞여 조화될 수 없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분파뿐 아니라 조반파 안에서도 급진파와 온건파로 나뉘는 등 파벌이 점점 분열하여 늘어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1968년 봄, 칭화 대학 교정은 급진 조반파인 징강 산 병단 총부와 온건 조반파인 징강 산 병단 4-14총부 두 진영으로 나뉘어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 송재윤, 슬픈중국 2권 문화대반란, 300page

 

2. 파벌싸움의 심각함

이렇게 분열된 홍위병들은 각 파벌들 끼리 서로 싸웠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당시 분명 청소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무기까지 동원하는 심각한 싸움을 벌였던 것입니다.

 

그 해 여름(1967년) 후베이의 우한에서는 기관총, 수류탄, 장갑차로 무정한 혁명군중이 조반파와 보황파로 양분되어 실제적인 내전에 돌입했다. - 송재윤, 슬픈중국 2권 문화대반란, 279page

1967년 여름, 두 패로 나뉜 다수의 군중조직들은 서로 중화기를 들고 충칭의 곳곳에서 전면내전 혹은 인민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1967년 8월 8일에는 양쯔 강의 물줄기에서 함대가 동원되어 153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88해전까지 벌어졌다. 충칭시 정부의 기록에 따르면 1967년 여름부터 1968년 여름까지 모두 31번의 무장투쟁이 발생했다. 그중 24번은 총, 포, 탱크, 포선 등이 사용된 내전양상의 전투였으며 그 과정에서 대략 645명이 목숨을 잃었다. - 같은 책 296page

 

 

3. 활동이 매우 과격해짐

- 주중 외교공관 및 외교관 공격 

중국내부에서 홍위병들의 활동이 확대되면서 혼란이 극심해지자 각국은 자국 외교관들을 철수시키기 시작합니다. 그에따라 텅빈 외국의 외교공관들은 극성맞은 홍위병들의 투쟁 본부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들이 이런 행동까지 할 수 있었을까요?

 

홍위병들은 마오쩌둥의 암시를 따라서 인민해방군이 자신들을 보호한다는 확신 위에서 외교공관을 향한 난폭한 도발을 감행했다. - 송재윤, 슬픈중국 2권 문화대반란, 270page

 

또한 홍위병들은 자신의 확성기를 지나가다가 살짝 건드렸다는 이유로 외교관 부부를 공격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베이징에서는 프랑스 대사관 차량이 홍위병의 확성기를 살짝 건드리자 성난 홍위병들이 프랑스 외교관과 그의 아내를 차 밖으로 끌어내서 촘촘히 에워싸고는 때리고, 소리치고, 욕하고, 침을 뱉는 만행을 저질렀다.

- 송재윤, 슬픈중국 2권 문화대반란, 271page

 

- 마오쩌둥(모택동)의 가족까지 공격 대상으로 정함

홍위병들은 점점 이성을 잃어 이제는 자신들이 보위하는 대상인 마오쩌둥(모택동)의 가족까지 자신의 공격대상으로 선정하기에 이릅니다. 점점 분파가 늘어나고 늘어난 분파로 인해 파벌싸움이 심각해지면서 어떤 분파는 마오쩌둥(모택동)의 아버지가 부농이라고 공격하는 대자보를 붙이기에 이릅니다.

 

이런 행동은 마오쩌둥(모택동)에게 홍위병들이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을 줬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마오쩌둥(모택동)의 아비지 모이창은 부농이 맞다고 합니다.

 

뿐만아니라 홍위병들은 당시 북한의 지도자였던 김일성마저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면서 김일성에 대한 비판시위를 했고 이것을 본 마오쩌둥(모택동)은 홍위병들을 가만 두면 북중관계가 악화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마오쩌둥(모택동)에게 홍위병의 활동을 끝내야 겠다고 생각하게 된 원인들 이었습니다.

 

농촌으로의 상산하향

결국 마오쩌둥(모택동)은 1968년 7월 28일 홍위병 각 파벌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아 홍위병 활동을 중단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뒤 이어 68~69년까지 상산하향 운동이 펼쳐졌습니다. 이 운동이 솔직한 성격이 무엇이었을까요?

 

이 운동은 마오쩌둥(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젊은 학생들은 농민에게 배워야 한다'는 명분으로 학생들을 농촌으로 추방시킨 것이며 시골로 한번 가면 도시 거주권을 박탈당해서 죽을 때까지 거기 살아야 하는 사실상의 토사구팽이었다.

나무위키, 홍위병 편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 한 것은 농촌으로의 상산하향이 실시될 때 당시 홍위병이었던 청소년의 집이 부자인 경우 뇌물을 바쳐 상산하향의 대상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문화를 바꾼다고 난리를 쳐도 인간의 본성은 절대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