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com, pub-5408680833476551, DIRECT, f08c47fec0942fa0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3 - 해서파관 사건 이후에서 5-16통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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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3 - 해서파관 사건 이후에서 5-16통지까지

by 개인주의자 2024. 6. 4.

제가 바로 전 포스팅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2 - 문화(대)혁명의 시작, 해서파관 사건에서 우한이라는 작가각 지은 극본인 해서파관이라는 작품을 비판하면서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오쩌둥(모택동)의 최종목적은 자신의 대약진 운동을 비판했던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공격하여 자신이 다시 최고의 권력에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 이후 마오쩌둥(모택동)은 주석직에서 사임했었기 때문입니다. 류사오치를 공격하기 위해 우한을 공격한 것입니다.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시리즈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1 - 마오쩌둥(모택동)과 중국 인민들의 정신세계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2 - 문화(대)혁명의 시작, 해서파관 사건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4 - 대중동원과 홍위병의 등장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5 - 홍위병들의 구호, 조반유리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6 - 홍위병들의 활동(폭력 및 살인)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7 - 홍위병들의 활동(문화재 파괴)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8 - 홍위병의 분열과 류사오치의 수난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9 - 홍위병의 종말과 농촌으로 상산하향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10 - 마오쩌둥(모택동)의 죽음과 문화(대)혁명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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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파관 비판 이후

야오원위안이 해서파관을 비판한 '해서파관에 대한 비평'이 1965년 11월 10일 상하이의 문회보에 실었습니다. 그 후 2주 뒤 저장 성의 절강일보, 산둥 성의 대중일보 등 수많은 지방지에 그 글이 실렸습니다. 그러나 베이징의 신문에서 만큼은 실리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펑전(베이징 시 시장)이 막고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우한은 베이징 시 부시장이었습니다. 그리고 펑전의 후원자가 바로 마오쩌둥(모택동)의 최종목적인 류사오치 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야오원위안의 글은 결국 인민일보의 학술연구란에 실렸는데 그 이유는 저우언라이의 압박때문이었습니다.

 

11월 28일 저우언라이는 완강히 저항하는 펑전을 직접 만나서 야오원위안의 글을 신속히 게재하라고 독촉했기 때문이다. 물론 저우언라이는 펑전에게 이 사태의 배후가 마오임을 알렸다. - 송재윤, 슬픈중국 2권 문화대반란, 79page

 

그러자 야오원위안의 글이 11월 30일 인민일보의 학술연구란에 실렸으나 동시에 펑전은 편집인의 견해란에서 1957년 마오가 제창한 백화제방을 인용하여 사상의 다양성을 옹호했습니다.

 

류사오치

 

 

2월 제강

베이징을 비롯한 전국 신문에 실린 야오원위안의 글로인해 좌우논쟁이 활발해지자 이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펑전은 5인 소조를 소집했습니다. 원래 5인소조는 1964년 마오쩌둥(모택동)의 명령에 따라 만들어진 특별조직으로 문예계의 정풍 및 학술 비판의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별 활동이 없다가 펑전에 의해 1965년 2월 다시 소집되었습니다. 이들은 조장 펑전, 부조장 루딩이, 조원 저우양, 우렁시, 캉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여기서 캉성은 마오주의자로서 마오의 첩보원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회의를 하면서 어떤 말이 오갔는지 마오쩌둥(모택동)은 캉성을 통해 전부 듣고 있엇습니다.

 

이 회의에서 펑전은 노골적으로 우한을 지지하고 나섰고 해서파관 논쟁은 순수한 학술적 논쟁이며 우한과 펑더화이가 조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일부의 주장이라고 일축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부조장 루딩이는 그동안 전개된 조사보고서를 작성했고 2월 5일 세번의 수정 후 조장 펑전이 중공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 보고하여 당시 중앙행정의 실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 즉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이 모두 서명했고 2월 7일 우한시에 있던 마오쩌둥(모택동)에게도 보고되었습니다.

 

2월 제강에 대한 마오쩌둥(모택동)의 반격

2월 7일 마오쩌둥(모택동)에게 2월 제강이 보고되었을 때 그는 아무 이견없이 수용하는 척 하면서 서명했습니다. 그러나 마오쩌둥(모택동)은 자신의 아내 장칭을 반격했습니다. 장칭은 린뱌오와 함께 4월 10일 부대 문예공작 좌담회를 소집한 뒤 그 요록을 만들었는데 그 요록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었습니다.

 

건국 이래 우리는 마오쩌둥 사상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반공산당, 반사회주의 세력의 독재 아래 살아왔다!

- 송재윤, 슬픈중국 2권 문화대반란, 81page

 

이 내용이 무엇을 함의하고 있을까요? 마오쩌둥 사상은 마오쩌둥(모택동)본인에게 있어 그냥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야오원위안의 해서파관 비판 글이 마오쩌둥(모택동)의 생각이었다면 그것을 반대한 5인 소조와 그 보고서에 서명한 중공중앙 실권자들은 마오쩌둥(모택동) 사상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반공산당, 반사회주의 세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닌 마오쩌둥(모택동)이 치밀하게 기획한 것이라고 합니다.

 

캉성의 일지에 따르면 마오는 1965년 여름부터 치밀하게 모든 상황을 기획하고 있었다.

- 송재윤, 슬픈중국 2권 문화대반란, 83page

 

캉성

 

공식적인 문화(대)혁명의 개시, 5-16통지

5-16 통지는 1966년 5월 4일~26일에 걸쳐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 중 이었던 5월 16일에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 통지가 채택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5-16 통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통지의 주요내용은 바로 2월 제강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그들은 2월 제강의 10대 죄악을 지적하면서 펑전 등을 반혁명분자로 몰아갔다. 그가 우한의 희곡 해서파관을 옹호하고 진실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고 주장했다는 이유였다. - 송재윤, 슬픈중국 2권 문화대반란, 84page

 

이로인해 2월 제강에 서명했던 많은 인사들이 발뺌을 하기 시작했고 곧이어 중공중앙의 행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4명을 몰아내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그들은 중앙서기처를 장악하고 있는 펑전,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뤄루이칭, 문화 및 사상전선의 지휘관이었던 루딩이, 국가기밀 및 정부 연락망을 관장하는 양상쿤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1966년 6월 부터 이 네 명을 포함한 그들의 가족까지 엄청난 인민재판에 시달렸고 중난하이에서는 이들을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으며 베이징 전 지역에서 집회가 이어졌습니다. 

 

양상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