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com, pub-5408680833476551, DIRECT, f08c47fec0942fa0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2 - 문화(대)혁명의 시작, 해서파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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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2 - 문화(대)혁명의 시작, 해서파관 사건

by 개인주의자 2024. 6. 2.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기전에 먼저 그 행동을 할 생각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지배하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정신세계 즉 사상입니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기 전 마오쩌둥(모택동)과 인민들 모두 광기의 씨앗을 이미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화(대)혁명은 어떤 순서로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시리즈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1 - 마오쩌둥(모택동)과 중국 인민들의 정신세계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3 - 해서파관 사건 이후에서 5-16통지까지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4 - 대중동원과 홍위병의 등장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5 - 홍위병들의 구호, 조반유리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6 - 홍위병들의 활동(폭력 및 살인)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7 - 홍위병들의 활동(문화재 파괴)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8 - 홍위병의 분열과 류사오치의 수난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9 - 홍위병의 종말과 농촌으로 상산하향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10 - 마오쩌둥(모택동)의 죽음과 문화(대)혁명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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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의 발단, 해서파관 사건

1. 해서파관은 무엇이며 왜 만들어 졌는가?

해서파관은 1961년 우한이라는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배이징 경극단의 극본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마오쩌둥(모택동)의 특명을 받아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마오쩌둥(모택동)은 1958년 12월 후난성 창사에서 생사패라는 전통악극을 관람한 후 해서의 정신을 배우라고 훈시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허위보고를 일삼는 간부들을 질타하기 위함이었다. - 송재윤, 슬픈중국 2권 문화대반란, 61page

 

그리고 우한은 마오쩌둥(모택동)의 특명을 받아 해서파관이라는 극본을 만드는데 7번이나 수정을 거쳐 만들어 졌습니다. 그렇다면 해서파관의 내용이 무엇이었을까요? 대략적인 내용을 알아봅시다.

 

해서파관의 작가 우한

 

이 연극은 정직한 관리가 자신의 경력을 희생하여 백성들의 불만을 황제에게 전달하는 비극이다. 이 연극에서는 해서를 황제와의 접견을 요청하는 유능한 치안 관리로 묘사한다. 그리고 나서 해서는 가정제가 정부의 다른 관리들에 의해 자행된 부패와 학대를 용인하고 있다고 직접적으로 비판한다. 가정제는 해서의 비판에 매우 화가 나서 해서를 관직에서 해임시켰지만 해서는 가정제가 죽은 다음에 다시 관직에 오르게 된다. - 위키백과 해서파관 편

 

이 내용을 놓고 보자면 여기서 황제인 가정제는 마오쩌둥(모택동)이 되는 것이고 해서는 루산회의에서 마오쩌둥(모택동)에게 반대했다는 이유로 파면된 펑더화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 극본이 마오쩌둥(모택동)의 특명에 의해 만들어 졌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2. 해서파관과 마오쩌둥(모택동)의 관계

송재윤 교수의 슬픈 중국 2권 문화대반란에서는 해서라는 명나라 충신을 처음 홍보한 사람이 마오쩌둥(모택동)이라고 나옵니다. 거기다가 해서파관이라는 극본을 만든 것도 마오쩌둥(모택동)가 우한에게 특명을 내린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책과 자료에서는 마오쩌둥(모택동)이 해서파관 집필과 별 관계가 없는 것처럼 나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해서의 정신을 배우라고 말한 사람이 마오쩌둥(모택동)이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송재윤 교수의 책에서는 이런대목이 나옵니다.

 

주치의 리즈수이의 회고에 의하면, 그 역시 마오의 계략일 수도 있다. 리즈수이의 주장대로 마오가 모든 상황을 내다보고 함정을 파놓았을 수도 있다. - 송재윤, 슬픈 중국 2권 문화대반란, 75page

 

즉 뭔가를 노리고 한 음모라는 것입니다. 사실 마오쩌둥(모택동)의 전력을 봤을 때 저도 이 의견에 동의합니다.

 

해서파관의 주인공 명나라 대신 해서

 

3. 해서파관에 대한 비난

해서파관에 대한 첫번째 비난은 1965년 11월 당시 젊은 작가였던 야오원위안이 마오쩌둥(모택동)의 지도를 받아 작성하여 상하이의 문휘보에 의해 보도된 '해서파관에 대한 비평'이었습니다.

 

야오원위안이 쓴 해서파관은 매우 긴 장문으로서 장황합니다만 가장 중요한 내용은 가정제가 간언을 하는 충신인 해서를 파관했다는 것에서 가정제는 마오쩌둥(모택동)으로 대비되고 충신인 해서는 루산회의에서 대약진 운동의 참상을 마오쩌둥(모택동)에게 직언했다가 파면당했던 펑더화이로 대비된다는 것입니다.

 

해서파관은 펑더화이는 충신이지만 마오쩌둥(모택동)은 혼군 = 암군이라는 비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여기서 혼군과 암군은 동의어로서 사리어 어둡고 어리석어 국가에 큰 해악을 끼친 임금을 일컫습니다.

 

왜 해서파관을 겨냥했나?

마오쩌둥(모택동)은 해서파관의 내용이 자신과 펑더화이의 관계를 암시하게 될 줄 몰랐을까요? 마오쩌둥(모택동)이 분명 제가보기에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은 아닌 것 같지만 적어도 권력다툼에서는 대단한 감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위에서 쓴 주치의 말대로 뭔가 계략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왜 해서파관을 가지고 계략을 짰을까요? 왕단의 저서에 의하면 해서파관을 쓴 우한이 바로 류사오치와 관련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한을 통해서 류사오치를 공격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왜 해서파관이라는 희곡을 선택했는가? 바로 우한이 베이징 시 부시장이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과 장칭이 우한을 공격했지만 사실 표적은 펑전(베이징 시 시장)이었다. 그리고 펑전을 공격할 때 사실상의 표적인 펑전의 후원자 류사오치였다. ··· 중간생략, 내막을 제대로 몰랐기에 펑전은 야오원위안의 글에 반박하여 자신의 부하를 보호하려 했다.

왕단, 왕단의 중국현대사, 218~219page

 

그러니까 최종 공격목표인 류사오치를 공격하기위해 당구용어로 이른바 쓰리쿠션을 이용한 것입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홍위병이 등장하는 과정을 쓰고자 합니다.

 

야오원위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