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com, pub-5408680833476551, DIRECT, f08c47fec0942fa0 마오쩌둥(모택동)의 대약진 운동 비판 2 - 인민동원을 위한 인민공사(코뮌)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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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모택동)의 대약진 운동 비판 2 - 인민동원을 위한 인민공사(코뮌)의 등장

by 개인주의자 2024. 5. 23.

마오쩌둥(모택동)의 대약진 운동은 바로 중국의 어마어마한 인구를 이용하여 15년 내에 영국과 미국을 따라잡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목표를 이루기 위한 작업에 인민들을 대규모로 그리고 효율적으로 동원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마오쩌둥(모택동)이 만든 것이 바로 인민공사(코뮌)이라고 합니다.

 

 

마오쩌둥(모택동)의 대약진 운동 비판 시리즈

마오쩌둥(모택동)의 대약진 운동 비판 1 - 대약진 운동의 시작

 

마오쩌둥(모택동)의 대약진 운동 비판 3 - 참새 대학살 촌극

마오쩌둥(모택동)의 대약진 운동 비판 4 - 반대자 숙청의 역사

마오쩌둥(모택동)의 대약진 운동 비판 5 - 대약진 운동은 왜 실패했는가?

 

각 빨간 글씨를 클릭하면 해당 글로 이동합니다.

 

여기서 제가 인민공사를 코뮌이라고 말한 것은 인민공사를 만들면서 표방했던 것과 코뮌의 의미가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코뮌이 무엇일까요?

 

코뮌은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모여 함께 살며 공동의 이익, 재산, 소유, 자원을 공유하는 공동체이다.

위키백과, 코뮌

 

인민공사(코뮌)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1949년 공산당이 중국대륙을 통일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한 후, 전국에 각 마을 단위까지 공산당의 세포라고 할 수 있는 단체를 만들어 갔습니다. 이 단체의 목적은 농민들을 농업집산화에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이 단체는 초급 농업 생산 합작사를 거쳐 고급 농업 생산 합작사로 개편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스탈린 방식의 집단농업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었습니다.

 

여기서 농업집산화와 스탈린 방식의 집단농업이라는 것은 공동생산을 하고 공동분배하는 집단농장을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지주나 자작농이나 모두가 집단농장에 소속되어 노동자가 되는 시스템으로 결국 농노제와 비슷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고급 농업 생산 합작사를 마오쩌둥(모택동)은 1958년 7월 이후 인민공사로 개편하게 됩니다. 이 인민공사는 농업뿐만 아니라 공업, 상업, 문화, 교육, 군사 등 다른 분야를 망라하는 인민동원체제였던 것입니다.

 

 

마오쩌둥(모택동)이 만든 인민공사(코뮌)의 실상

1. 공동식당 설립

인민공사(코뮌)는 농민들을 군사조직과 비슷한 사회조직에 배치함으로써 수많은 농민들이 자신이 지금까지 대를 이어 살아온 삶의 방식을 버려야 했습니다. 거기다가 공동식당이라는 것이 만들어졌고 따라서 농민들은 숟가락, 젓가락, 솥, 냄비, 그릇 등 식사와 관련된 모든 가재도구를 빼앗겼으며 심지어 개인이 기르던 가축(닭, 오리, 소 등)도 모조리 빼앗겼습니다.

 

더 큰 문제는 공동식당이 여러 군데가 아니라 한 인민공사당 한 개만 운영되다 보니 공동식당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농민들의 경우 밥 한 끼를 먹기 위해 수 킬로미터씩 걸어와 식사를 해야 했습니다. 사실 공동식당은 에너지 낭비를 방지하고 효율적으로 배급을 할 수 있다는 생각하에 만들어졌지만 많은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2. 생산량 부풀리기와 통계조작

마오쩌둥(모택동)은 대약진 운동을 시작하면서 유토피아적 환상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현실을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최고지도자라는 사람이 그러고 있으니 생산량이 하락하거나 정체되어 있는 것은 태만으로 간주되었고 지방 관리들에게 있어는 불충으로 간주되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방관리들은 너도 나도 전부 생산량 부풀리기와 통계조작을 하면서 위로 올라가는 보고서를 조작하기 일쑤였습니다.

 

중공정부는 전국의 인민공사에 생산량의 비약적인 증가를 요구했다. 인민공사들은 경쟁적으로 전년도 곡물 수확량을 몇 배나 상회하는 환상적인 목표량을 발표했다. - 슬픈 중국 2, 송재윤, 373page

 

거기다가 철강 생산량의 증가를 위해 농민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빼앗아 갔습니다.

 

철강 생산의 원재료를 확보하기 위해 간부들은 농가의 밥그릇, 숟가락까지 각출했다. 오두막의 목재는 물론 과수원의 원목들까지 싹 쓸어갔다. 토법연강(민간 제련법)의 용광로에 땔감으로 쓰기 위함이었다.

슬픈중국2, 송재윤, 359page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철강생산은 철광석을 녹여 철 성분을 빼내어 새로운 철을 생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대약진 운동 당시에는 새로운 철을 만들기보다 기존의 농기구, 철 식기 등을 빼앗아 녹인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생산이 아닙니다.

 

대약진 운동기간에 철을 녹일 수 있는 간이 용광로를 농촌 곳곳에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진 철은 품질이 매우 조악하고 나빠서 어디에 쓸 수도 없었습니다.

 

3. 엄청난 기근과 굶주림

농민들은 농사를 지을 농기구도 철강생산량을 늘린다는 미명하에 전부 빼앗기고 심지어 과수원의 나무까지도 철을 녹이는데 쓰는 땔감으로 쓴다고 빼앗겼습니다. 거기다가 농민들이 농사지을 시간에 철을 만들고 저수지나 교량 등 인프라 건설에 동원되고 하는 바람에 농사지을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거기다가 인민공사는 농민들을 매우 가혹하게 대했고 심지어 너무 많은 작업량에 시달리다 보니 기본적인 휴식시간도 부족했습니다.

 

이런 대기근과 그로 인한 굶주림은 인민공사로 대표되는 잘못된 생산시스템인 집산화의 문제도 있지만 다음 포스팅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참새 대학살에도 원인이 있습니다. 마오쩌둥(모택동)은 농촌을 시찰하다가 농민들이 말리기 위해 길바닥에 널어놓은 곡식을 참새들이 먹는 것을 보고 어디 인민들이 먹는 신성한 양식을 먹는가? 하면서 참새들을 전부 잡을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참새는 농사에 지장을 주는 해충들을 잡아먹는 천적이었습니다. 천적이 전부 죽어나가자 천적이 없던 해충들이 대규모로 창궐하여 결국 농사를 전부 망치는 우를 범한 것입니다.

 

먹기위해 나무껍질 벗기는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