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com, pub-5408680833476551, DIRECT, f08c47fec0942fa0 마르크스(맑스)의 자본론 비판 3 - 인간 본성에 대한 논의(성선설, 성악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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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맑스)의 자본론 비판 3 - 인간 본성에 대한 논의(성선설, 성악설)

by 개인주의자 2024. 5. 17.

마르크스(맑스)는 인간의 본성을 원래 선하다, 즉 성선설로 봤습니다. 마르크스(맑스)가 말한 선하다(성선설)의 의미는 모든 개인은 자기자신을 부정하고 집단에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것입니다. 반대로 마르크스(맑스)가 살던시절 자신이 보았던 현상을 가지고 분석했던 이른바 착취라는 것은 매우 개인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개인의 이익을 위한다는 것은 매우 악한 이기심(성악설)으로 봤던 것입니다.

 

마르크스(맑스)의 자본론 비판 시리즈

마르크스(맑스)의 자본론 비판 1 - 노동가치론과 효용가치론

마르크스(맑스)의 자본론 비판 2 - 유통, 물류, 순수 유통(상업)에서는 가치 창출이 없다?

 

마르크스(맑스)의 자본론 비판 4 - 공산주의는 왜 망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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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인간 본성의 선함(성선설)과 현실적 괴리에 대해 마르크스(맑스)는 그 원인을 무엇이라고 진단했을까요? 바로 사회적 구조가 그렇게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마르크스는 인간 본성이 사회와 무관한 고정불변의 것이라는 상식에 반대했다. 그는 불변의 인간 본성처럼 보이는 많은 특징이 사실은 사회마다 매우 달랐음을 보여 줬다. 

마르크스가 경제학 철학 수고(1884년)에서 설명했듯이, 우리 종의 본질은 또한 사회적 존재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사람들은 개인적 선호와 관계 없이 서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왜냐하면 협력해야만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강조했다.

마르크스 21, 마르크스의 소외론, 3호(2009년 가을)

 

인간본성에 관한 여러 담론

기독교적 담론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인간본성을 악하다, 즉 성악설로 보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바로 성경의 모든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 창세기에는 '죄'라는 것이 없던 세상에 '죄'가 들어오는 과정을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라는 두 인물을 통해 설명하고 있고 그 이후 아담과 하와의 자손들(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 '죄'가 들어온 결과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에서는 인간들이 때로는 함께 단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반대로 사유재산이라는 것을 허용하여 개인적인것들에 대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십계명을 통해 내 것과 타인의 것을 구분합니다. 바로 '도둑질을 하지말라'라는 계명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아벨을 살해하는 카인

 

리처드 도킨스의 담론

리처드 도킨스는 인간본성이 원래 악하다, 즉 성악설이라면 왜 협동이나 타인에게 하는 자선행위 같은 것들 그리고 또 다른 여러 이타적인 행동이 나오는 모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위 또한 사실 이기적인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기적 유전자론 입니다.

 

도킨스의 주장은 한마디로 내와 내 자손이 살아남기 위해 때로는 이타적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타적인 행동의 최종 종착지는 결국 '나'라는 것입니다.

필자의 담론

필자는 개인적으로 기독교인으로서 성경의 관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인간은 죄성이 태어날 때 부터 내재되어 있어 인간본성이 악하다라는 성악설을 따릅니다. 물론 제 안에 죄가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또한 성경에도 때로는 인간들이 하나로 뭉쳐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협동하는 모습도 나오기도 하고 또 개인으로서 사유재산이 보장되는 모습도 나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개인과 공동체라는 두 개념이 같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행과 이타적인 행동에 대해 필자의 견해를 말하자면 이 부분은 도킨스의 견해가 어느정도 옳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배신감'이라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천륜이라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도 배신감이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이 배신감은 왜 드는 것일까요? 바로 내가 타인에게 give룰 했는데 의식을 하던 하지않던 원하는 take가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예를 들겠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열심히 키우고 나중에 재산도 물려줍니다. 그러나 자식은 부모를 버렸습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배신감을 느낍니다. 왜 일까요? 부모는 자식을 키우고 재산을 물려주면서 뭔가 take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take를 원했습니다. 예를들자면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이놈이 나를 버리지는 않겠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라는 take보다 훨씬 못하는 take가 왔을 때 부모는 배신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따라서 take가 없는 완전한 give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의 사례

필자가 생각하기에 불교야 말로 도킨스적인 사상을 제대로 실천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많은 불자들이 있고 그중에 상당수의 불자들이 여러가지 모습으로 선행을 합니다. 그런데 이 선행의 최종목적이 무엇일까요?

 

불교의 사후세계관은 윤회입니다.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지 않는 이상 그 존재는 죽어도 없어지지 않고 계속 윤회하여 때로는 사람, 때로는 동물, 때로는 곤충같은 것들로 다시 태어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이번 생에 어차피 부처가 못될바에 다음생에 뭔가 좋은 것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 업장과 선행의 양입니다. 이 업장과 선행은 서로 상쇄하는 면이 있어 선행을 많이 쌓으면 업장이 그만큼 줄어들고 반대로 업장이 많이 쌓이면 그만큼 선행을 깍아 먹습니다. 따라서 의식하든 안하든 많은 불자들이 선행하는 최종목적에는 다음생에 좋은 것으로 태어나기 위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나'라는 개념이 바로 선행의 최종 종착지 입니다.

 

 

마르크스(맑스)와 공산주의의 오류

역시 편협했다

마르크스(맑스)의 책을 통해 그의 주장을 보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항상 드는 생각이 일부를 마치 전체인 것처럼 본다는 것입니다. 제가 위에서 설명드렸듯이 인간의 역사와 삶에서는 공동체적인 면과 개인적인 면이 혼재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마르크스(맑스)는 두 가지 중에 공동체적인 것만을 가져와 이것이 마치 전체인 것처럼 말하고 개인적인 것은 사회구조가 조장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되면 당연히 개인적인 면을 없애기 위해서는 사회구조를 바꾸는 혁명을 해야한다는 것이 귀결이 되고 맙니다.

공동체의 실체는 개인이다

마르크스(맑스)의 사상을 보다보면 공동체가 무엇을 한다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예를들자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가 그것입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는 것은 노동자집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집단이 독재를 한다는 말이됩니다.

 

따라서 마르크스(맑스)는 집단이라는 것에 실체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집단이라는 것이 실체가 있는 것일까요? 세상의 모든 집단은 개인이라는 인간들이 모여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개인들이 어떤 이유로든지 뿔뿔이 흩어지면 집단은 실체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짜 실체는 집단이 아니라 집단을 이루는 개인입니다.

협력과 이타적인 행동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이다

제가 위에 제시한 인용문에 "협력해야만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결국 협력의 최종목적은 무엇입니까? 바로 나의 생존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협력해도 내가 생존할 수 없다면 아무도 협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크스(맑스)는 어리석게도 개인적인 측면을 배제하려 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악하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나'를 배제한 공산주의는 망할 수 밖에 없다

협력과 이타적인 행위의 최종목적이 결국 '나의 생존'이라면 사실 집단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나'임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맑스)는 '나'를 배제시켰으며 그의 사상으로 이루어진 공산주의 사회는 '나'라는 개념이 완전이 말살되어 없어진 사회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결국 엄청난 인명피해만을 남기고 처절한 실패로 끝이 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