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com, pub-5408680833476551, DIRECT, f08c47fec0942fa0 고종과 민비(명성황후)의 나라 말아 먹기 1 - 매관매직
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고종과 민비(명성황후)의 나라 말아 먹기 1 - 매관매직

by 개인주의자 2024. 3. 27.

우리는 과거 학교에서 국사시간에 배워오기를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하다가 물러난 뒤 고종과 민비(명성황후)가 재위에 올라 늦었지만 개화를 잘해나가고 있었는데 악마 같은 일본이 그런 조선을 덥석 자신의 식민지로 삼켰다고 배웠습니다. 과연 그게 맞을까요?

 

제가 조선이 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유 2라는 글 첫 부분에 썼듯이 사실 일본 입장에서 한반도 전체를 식민지로 만든다는게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다면 조선이 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유 2를 참조해 주시고 빨간 글씨를 참조하면 해당 글로 이동합니다.

 

고종

 

조선은 고종과 민비(명성황후)가 모두 망쳤다

조선이 결국 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결국 고종과 민비(명성황후)의 잘못입니다. 이 두 사람이 나라를 개판으로 운영했기 때문에 결국 망하고 비참하게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조선이 망한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이번 포스팅에서는 그중에서 매관매직에 대해 쓰고자 합니다.

 

매관매직이란

매관매직이란 아시다시피 관직을 돈으로 사고파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18세기 이전에는 매관매직을 꿈도 못 꿨습니다. 주자성리학적 사상이 깊게 배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선말기 고종과 민비(명성황후)의 재위기간에 들어서 나라가 망조가 들렸는지 왕과 왕비인 고종과 민비(명성황후)가 나서 매관매직을 했습니다.

 

왜 고종과 민비(명성황후)는 매관매직을 시작했는가?

1875년 조선 조정의 1년 세입은 52만 냥이었다고 합니다. 이 와중에 청나라의 칙사가 네 차례나 조선을 방문하면서 80만 냥을 임시 지출했습니다. 이로 인해 재정이 바닥난 조선정부는 시중 상인들에게 공물비용으로 지급하지 못한 금액이 50만 냥에 달했고 이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차관 도입, 매관매직, 동전발행 등을 했습니다.

 

조선은 명나라나 청나라 사신이 오면 그에게 엄청난 대우와 공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만약 이 부분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다면 한중관계의 역사 2 - 중국 사신 대접을 참조해 주시고 빨간 글씨를 참조하면 해당 글로 이동합니다.

 

매관매직의 실상

1. 임기를 최대한 짧게

현재도 그렇지만 조선에도 관직의 수는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제한된 관직 수로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임기를 최대한 짧게 해야 합니다. 

 

현 부산지역에는 동래부가 있었고 그곳에 동래부사라는 벼슬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때는 현재처럼 교통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한양(서울)에서 신임 동래부사로 임명된 자가 임명장을 받고 동래까지 내려가는데 약 한 달이 걸렸습니다. 서울에서 임명장을 받고 한 달 동안 열심히 내려가서 동래부에 도착해 전임 동래부사에게 업무 인수인계를 할 때 쯤이면 서울에서 새로운 동래부사가 임명장을 받고 동래부로 내려갈 준비를 했습니다. - 김용삼 기자 강의 중에서

 

위의 참조내용은 제가 약간 첨가하고 각색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내용은 김용삼 기자의 강의 내용과 일치합니다. 여기서 한양(서울)에서 동래부사로 임명된 자가 실제로 동래까지 내려가는데 약 한달이 걸린다고 했습니다. 한달동안 열심히 동래까지 내려가서 전임 동래부사로부터 업무인수인계를 시작할 때쯤이면 새로운 동래부사가 한양(서울)에서 임명장을 받고 동래를 내려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방금 도착한 동래부사의 임기는 역시 방금 한양(서울)에서 임명장을 받고 출발한 사람이 동래에 도착하는 기간인 약 한 달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있겠습니까?

 

동래향교

 

 

2. 관직 별 가격까지 정해 놓음

 

고종과 민비(명성황후)는 매관매직을 더 활성화시키기 위해 관직별로 가격까지 정해놨습니다. 한마디로 정가제로 하겠다는 말이겠지요.

 

모든 관직은 가격이 정해져 있었는데, 예를 들어 관찰사 자리는 5만 달러 정도라고 한다.

H.B 헐버트, 대한제국멸망사 - 김용삼 지금 천천히 고종을 읽는 이유 180page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자면

 

감사와 유수 자리는 엽전 100만 꾸러미에서 40만~50만 꾸러미, 처음 관직에 나서는 초사는 5000~1만 꾸러미였다. 과거시험도 돈을 받고 합격자를 냈다 대과는 5만~10만 꾸러미, 생원과 같은 소과의 경우 2만~3만 꾸러미로 등급에 따라 가격이 달랐다.

황현, 오하기문 - 김용삼 지금 천천히 고종을 읽는 이유 180page

 

 

3. 과거시험 횟수 늘리기

고종과 민비(명성황후)는 과거 급제자체를 팔기 위해 여러 종류의 과거시험의 횟수를 늘리는 방법을 썼습니다.

 

증광시를 한해 걸러 즉 2년에 한 번 실시.
응제시를 한 달 걸러 즉 두 달에 한번 실시
식년과(식년시)는 두 번씩 실시 - 황현, 매천야록 - 박종인, 매국노 고종

 

여기서 증광시는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던 특별 과거시험입니다. 따라서 원래 어떤 정해진 때가 없던 시험이었는데 고종과 민비(명성황후)가 특별한 경사가 없어도 과거급제를 팔아먹기 위해 때를 정한 것입니다.

 

응제시는 임금이 특별히 주재하던 시험으로서 고종이전에는 매우 특별하게 비정기적으로 봤던 것으로 보입니다.

 

식년과(식년시)는 식년, 즉 3년에 한 번 열리는 과거시험을 말합니다. 여기서 3년마다 보는 것은 변하지 않았고 단지 3년에 한 번 보던 것을 같은 기간에 두 번을 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잦은 과거시험의 폐단을 민망히 여긴 민응식이 고종에게 그 폐단을 고하자 고종은

 

"잔말 말라. 조선말기에 마을마다 급제자가 나고 집집마다 진사가 난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가. 그게 대운이라는 것인데 짐이 과거를 팔지 않으면 그들이 대운을 건질 더 좋은 방법이 있겠는가?"

 - 황현, 매천야록 - 박종인, 매국노 고종

 

과거시험 재현

 

 

여러분은 동학농민운동을 알고 계실 겁니다. 동학농민운동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에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조선 전체에 극심했던 가렴주구가 왜 일어났을까요? 먼저 당시 지방관리들에게는 정해진 봉급이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돈을 주고 관직을 샀으니 본전을 뽑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가렴주구가 더 심해진 것입니다.

 

고종과 민비(명성황후)의 나라 말아 먹기 시리즈 - 빨간글씨를 클릭하면 해당 글로 이동합니다

 

고종과 민비(명성황후)의 나라 말아 먹기 2 - 가렴주구의 시작(민씨척족의 등장)

 

고종과 민비(명성황후)의 나라 말아 먹기 3 - 민씨척족의 가렴주구(임오군란)

 

고종과 민비(명성황후)의 나라 말아 먹기 4 - 무속과 미신에 미치다

 

고종과 민비(명성황후)의 나라 말아 먹기 5 - 총애 받은 무당 진령군

 

고종과 민비(명성황후)의 나라 말아 먹기 6 - 경제정책과 재정관리